
| 한스경제=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지난해 ESG는 정치적 이념 논쟁과 규제 피로감이 겹치며 ‘후퇴론’이 고개를 들었다. 일각에서는 “ESG는 일시적 유행”이라거나 “기후위기는 과장됐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소음과 달리 글로벌 시장은 이미 일관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탄소 규제와 공급망 기준, 공시 표준, 금융 규범 등이 동시에 강화되면서 ESG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력과 경쟁력을 가르는 조건으로 재정의 되는 중이다.
결국 ESG의 본질은 이념이나 구호가 아니다. 불확실성을 줄이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실용적인 경영 프레임이다. 그래서 파도 자체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만들어내는 바람의 방향을 먼저 읽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6년은 제도 정비 중심의 준비 단계를 넘어, ESG가 기업의 비용 구조와 리스크 관리, 전략적 의사결정 전반에 본격적으로 내재화되는 ‘실전의 원년’이 될 전망이다.
▍EU發 탄소규제의 현실화가 재무제표에 반영되는 첫 해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2023~2025년 전환기간 동안 배출량 보고만 요구했지만, 2026년부터는 실제비용 부과단계에 진입한다. 전환기간이 끝난 올해부터는 배출량 검증, 인증서 구매, 공급망 단위의 배출관리까지 요구되면서, 기업의 비용구조가 재편되는 국면에 들어가게 된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기⸱수소 등 탄소 다배출 업종은 2026년부터 탄소비용이 재무제표에 반영되는 첫 해를 맞는다. 각국의 탄소가격 정책 변화와 무상배출권 할당 축소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산업 간 원가구조와 경쟁력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기업은 감축비용, 공정전환, 제품가격전략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해야 하는 구조적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글로벌 공시체계 표준화·의무화는 ‘공시’가 아닌 ‘경영 인프라’의 재편
IFRS S1·S2가 2024년 보고기간부터 적용 가능해지면서, 주요국은 2025~2027년 사이 ISSB 기준의 단계적 의무화를 예고하고 있다. TCFD는 2024년 ISSB로 공식 통합되었고, 업종별 SASB 기준 역시 ISSB 체계에 맞춰 재정비가 진행되면서 글로벌 공시는 단일 표준으로 빠르게 수렴하고 있다.
이는 ESG 평가기준이 ‘영향중대성’에서 ‘재무중대성’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불어 ISSB가 생물다양성·자연자본(S3), 인권·인적자본(S4) 등 후속기준 개발에 착수함에 따라, 2026년 전후로 ESG 공시의 범위와 심도는 환경(E)을 넘어 사회(S)와 지배구조(G) 전반으로 확장될 전망이다.
EU CSRD는 지난해 11월 옴니버스 패키지 확정을 통해 적용 범위를 조정하며 규제의 현실성과 수용성을 높였다. 인권·환경 실사를 규정하는 EU 기업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은 일부 지연됐지만, 유럽 기업들은 이미 한국 기업을 포함한 공급망 협력사들에게 사실상 제도 수준의 ESG 실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제도보다 시장이 먼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서도 2027년 이전 ESG 공시의무화를 목표로 ISSB 기반 KSSB기준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금융당국이 세부시행 시점을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글로벌 공시 환경이 빠르게 정렬되고 있는 만큼 기업은 2026년 회계부터 ISSB 체계에 부합하는 데이터 운영을 사실상 시작해야하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6년은 법적 의무화 여부와 무관하게, 불확실한 미래 환경에서 기업의 본원적 경쟁력을 가늠할 국제 공시기준에 대응해 경영 인프라를 재편해야하는 ‘실전 준비의 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탄소배출권 시장의 ‘금융화’, 기업⸱금융 모두에 새로운 리스크 부상
2015년 도입된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2026~2030년 제4차 계획기간에 진입하면서, 시장이 규제 중심에서 금융 중심 구조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ETS(탄소배출권) 가격에 연동한 ETF·ETN 등 금융상품이 출시된 데 이어, 2026년에는 국내 ETS를 기초자산으로 한 선물시장까지 개설될 예정이어서 탄소시장의 금융자산화가 본격화되는 전환점에 들어섰다.
이러한 변화는 배출권을 더 이상 단순한 비용항목으로 보지 않고, 기업의 리스크관리 지표이자 전략적 자산으로 재정의 하게 만든다. 동시에 금융기관 또한 투자·대출 의사결정 과정에서 탄소가격 변동성을 새로운 리스크 기준으로 반영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다만 국내 배출권 시장이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낮은 거래량과 큰 가격 변동성, 제한적인 정보공개, 미흡한 법·제도 인프라, EU ETS 대비 취약한 시장기반과 가격 격차 등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K-GX 전략, 한국형 산업 재편과 정의로운 전환을 본격적으로 여는 출발점
정부는 2035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를 53~61% 감축하는 NDC를 제시하며, 산업·에너지 구조전환의 대전제를 열어놓았다. 정부는 이를 ‘K-GX(대한민국 녹색전환)’ 전략으로 규정하고, 재생에너지 확대, 수소환원제철,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에너지저장장치(ESS), 초고압직류송전(HVDC) 등 산업인프라 전반의 구조적 혁신을 추진하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밝히고 있다.
2026년 상반기 발표될 K-GX 중장기 로드맵은 더 이상 환경정책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한국 제조업과 에너지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다시 설계하는 ‘산업 리빌딩 전략’이자, 전환기의 국가 산업정책을 가늠 할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기술도입 속도, 투자여력, 공급망 재편 능력에서 나타나는 격차는 곧 기업 간 경쟁력의 차이로 전이될 것이며, K-GX는 ‘한국형 산업 재편’과 ‘정의로운 전환’을 본격적으로 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사회(S)·지배구조(G) 규제의 실질화로 기업 경영구조의 전환 촉발
환경(E) 중심으로 전개돼 온 국내 ESG 경영은 2026년을 기점으로 사회(S)와 지배구조(G) 영역 전반의 관리책임을 본격적으로 재정비·강화하는 국면에 들어선다. 상법 개정안의 본격 시행, KSSB 기반 ISSB 연계 공시체계 준비와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화 확대는 S·G 영역을 보고의 대상에서 전략과 경영 시스템 전반을 재편하는 핵심 변수로 끌어올리고 있다.
사회(S) 분야에서는 국내 규제와 국제표준 전반에서 노동·인권기준의 강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집행 강화와 중대산업재해관련 공시 확대, 개인정보보호법 개정과 AI기반 데이터처리 규범의 고도화, 여기에 EU기업 지속가능성실사지침(CSDDD)의 최종안 확정과 발효일정 가시화가 맞물리며, 글로벌 밸류체인에 대한 실사요구는 사실상 ‘강제규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아울러 정보보호 공시 강화, 이사회·경영진 다양성 공개 의무, 성별·고용형태별 임금격차 공시, 정년연장 입법 추진, 비정규직 권리 강화, 포괄임금제 제한, 주 4.5일제 검토 등 일련의 제도 변화는 조직 운영과 인력구조 전반의 재설계를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동시에, 글로벌 투자자 평가 체계와의 정합성 확보라는 과제를 더욱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지배구조(G) 영역에서도 자본시장 접근성과 시장 신뢰 회복을 목표로 상법·자본시장법 개정이 연속적으로 추진되면서,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에서 시장 감시와 이사회 중심 구조로의 전환이 한층 가속화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임과 3% 의결권 제한, 이사의 성실·충실의무 확대,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 본격화, 스튜어드십 코드 적용 확대, 임원 보수 및 성과연동 보상 공시 강화, 영문 공시와 중점 공시 확대 등은 모두 이사회 독립성과 주주 친화적 거버넌스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려는 일관된 제도적 흐름으로 해석된다.
특히, 2026년부터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화가 코스피 전 상장사로 확대되면서, 지배구조는 단순한 공시 형식을 넘어 기업 경영의 품질과 이사회 독립성,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입체적으로 비교·평가하는 핵심 지표로 부상한다. 이는 주주행동주의 강화 흐름과 맞물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겨냥한 자본시장 구조 개선과 직결되며, 기업 가치평가 기준 자체를 재정의 하는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ESG의 전환(EX)의 속도와 깊이가 향후 10년의 기업 경쟁력 좌우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된 123대 국정과제 가운데 27개를 ESG 관련 정책으로 구성하며, ESG를 국가 전략 전반에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지난 12월에는 최초로 공공기관 맞춤형 ESG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정책 입안 단계부터 지속가능성 평가를 적용함으로써, 공공 영역 전반에 ESG 원칙을 내재화하는데 속도를 냈다. 아울러 스튜어드십 코드의 ESG 적용 범위를 전반으로 확대하는 등 ESG 경영 확산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단계적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이르면 이달 중 ‘ESG 정보공개 의무화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으로, ESG 규제 대응 수준에 따른 기업 간 격차가 본격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대응이 늦은 기업일수록 ‘ESG FOMO(뒤처짐에 대한 두려움)’가 재무성과와 사업 경쟁력, 기업 평판 전반으로 확산되며 구조적 리스크로 전이될 소지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규제 준수에만 머무는 ‘ESG 1.0식 대응’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규제를 기회와 혁신의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새로운 성장 축을 설계하는 ‘ESG 2.0전략’만이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2026년은 ESG가 논쟁과 선언의 영역을 넘어,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실질적으로 가르는 ‘실전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변화하는 정책과 경영 환경을 비용이 아닌 성장의 발판으로 전환해 전략적 EX(ESG Transformation)를 실행하는 속도와 깊이가, 향후 10년의 산업지형과 기업가치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