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정부가 발표한 ESG 공시 최종 로드맵은 우리나라 지속가능성 공시제도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특히 거래소 공시 중심의 체계를 법정공시로 전환하기로 한 것은 ESG 정보를 기업의 자율적 홍보가 아닌 자본시장의 공식 공시체계로 편입시키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SG 공시를 권고에서 제도로 전환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나라 지속가능성 공시체계는 한 단계 진전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로드맵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 ‘ESG 공시는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이다.
정책 전반을 살펴보면 기업의 부담 완화와 수용성 확보에는 상당한 무게가 실린 반면, 정작 ESG 공시의 존재 이유인 투자자의 정보 유용성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다. 공시제도의 성공은 기업이 얼마나 쉽게 공시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투자자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통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SG 공시는 기업을 위한 규제가 아니라 자본시장을 위한 정보 인프라다. 기업은 정보를 생산하지만 그 정보를 활용하는 주체는 투자자다. 투자자는 재무정보뿐 아니라 기후위험, 공급망 리스크, 인적자본, 지배구조와 같은 지속가능성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기업의 미래가치와 위험을 평가한다. ESG 공시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지속가능성 공시의 목적을 '투자자의 의사결정에 유용한 정보' 제공이라고 정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속가능성 정보는 기업의 사회적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자료가 아니라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칠 위험과 기회를 투자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자본시장의 공통 언어다. 결국 ESG 공시의 품질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투자자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의 신뢰성, 비교 가능성, 연결성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최종 로드맵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기업의 현실적 부담을 고려한 단계적 접근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투자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의 적시성과 국제적 비교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했는지는 의문이다. 기업 수용성은 제도의 출발 조건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번 로드맵은 2021년 제시한 최초 ESG 공시계획과 비교하면 속도와 범위 모두에서 신중한 접근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국제 공시기준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글로벌 자본시장과의 정합성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 분명했다. 반면 이번 로드맵은 기업의 준비 수준과 부담을 우선 고려하면서 정책의 무게중심이 투자자보다 기업 쪽으로 이동한 모습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과 상당수 상장기업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며 GRI,SASB, TCFD 등 다수의 국제보고기준에 따른 정보공시 체계를 구축해 왔다. ISSB 기준에 맞춘 데이터 관리체계와 내부통제 시스템을 마련한 기업도 적지 않다. 이러한 기업들에게 공시 의무화 일정의 연기는 준비 시간을 늘려주기보다 오히려 선제적 투자의 효과를 약화시키고 제도적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국내외 투자자의 시각이다. 특히 글로벌 투자자는 공시 시행 시기보다 정보의 품질과 국제적 비교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국내 공시체계가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면 한국 기업의 ESG 정보는 글로벌 투자자의 투자 판단에서 활용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는 결국 자본조달 비용과 기업가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이번 로드맵에는 분명한 성과도 있다. 거래소 공시를 법정공시로 전환한 것은 ESG 정보를 기업의 선택이 아닌 자본시장의 공식 정보체계로 자리매김한 중요한 제도적 변화다. 앞으로 세부 공시기준이 국제 기준과 조화를 이루고 투자자 중심으로 보완된다면 우리나라 ESG 공시제도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SG 공시는 기업의 편의를 위한 행정제도가 아니라 투자자의 신뢰를 위한 시장의 언어다. 기업 수용성을 높이는 정책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투자자의 정보 유용성과 글로벌 정합성을 희생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최종 로드맵이 진정한 출발점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세부 기준과 운영 과정에서 '기업이 공시하기 쉬운 제도'보다 '투자자가 믿고 활용할 수 있는 제도'라는 원칙이 더욱 분명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 ESG 공시가 세계 자본시장에서 신뢰를 얻는 가장 빠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