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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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칼럼] 공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6-09-21 13:13:17 조회수 37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ESG 보고서의 두께가 곧 ESG 경쟁력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글로벌 이니셔티브에 가입했는지,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몇 페이지에 달하는지가 평가의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잣대만으로는 기업의 실질적인 ESG 역량을 가늠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언했느냐가 아니다. 그 선언이 실제 경영체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성과로 이어졌으며, 그 성과를 객관적인 근거로 입증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ESG 평가의 무게중심도 이제 ‘공시의 양’에서 ‘공시의 질과 실행력’으로 옮겨가야 한다.

ESG행복경제연구소는 2020년부터 코스피·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250대 기업의 ESG 수준을 평가해 왔다. 그 사이 ESG를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했다. GRI Standards를 비롯해 ISSB의 IFRS S1·S2, KSSB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ESRS 등 지속가능성 공시를 둘러싼 국내외 기준과 제도가 한층 촘촘해졌다. 국내 기업들도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에 대비해 관련 체계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공시가 제도화된다는 것은 ESG 평가에도 새로운 출발점이다. 기업이 ESG 정보를 공개했는지 여부 자체가 변별력이 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공개된 정보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으며 실제 경영성과와 연결돼 있는지를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ESG행복경제연구소와 한스경제 인사이트랩은 2026년 평가부터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한마디로 ‘근거가 없으면 점수도 없다(No evidence, No score)’​는 것이다. ESG 평가가 기업의 홍보자료나 자기선언을 그대로 옮겨 적는 작업이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원칙이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든 기업지배구조보고서든 사업보고서든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통해 목표와 관리체계가 확인돼야 한다. 여기에 그 체계가 실제 성과로 이어졌는지, 나아가 해당 성과가 외부검증 등을 통해 신뢰성을 확보했는지까지 추적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평가의 기본 틀이 ‘공시(D)→관리(M)→성과(P)→검증(V)’의 이른바 D-M-P-V 체계​다. 공시했다는 사실만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체계와 실행성과, 검증 수준까지 단계적으로 확인하는 구조다.

SBTi, RE100, TNFD, ISO 등 글로벌 이니셔티브 참여나 인증 역시 그 자체만으로 최고점을 보장하지 않는다. 실제 사업에 얼마나 폭넓게 적용됐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를 함께 들여다본다. 결국 ESG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 했는가’보다 ‘무엇을 실행했고 무엇으로 입증 했는가’​다. 

평가 시점도 바뀐다. 그동안은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연중 또는 연말까지 자율적으로 공시하는 현실을 감안해 해당 연도의 자료를 취합한 뒤 이듬해 2월에 등급을 발표해 왔다. 그러나 2026년부터는 11월 말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자료와 사건을 기준으로 해당 연도 평가를 마감한다.

이는 단순히 평가 발표 시기를 앞당기는 문제가 아니다. ‘해당 연도의 ESG 활동과 성과는 해당 연도에 평가 한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의미가 있다. 평가의 시의성을 높이고 기업과 시장이 그 결과를 보다 빠르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긍정적인 성과만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다. 기업 경영 과정에서 실제 발생한 중대한 ESG 사건을 ‘Controversy Check’​를 통해 확인하고 심각도에 따라 감점한다. 환경사고와 중대재해, 인권·노동 문제, 개인정보 유출, 횡령·배임, 회계 문제, 공정거래·금융당국 제재, 내부통제 실패, 주주권 침해 등이 대상이다.

다만 의혹 제기나 고발, 수사 착수 또는 소송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 감점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과 사안의 중대성, 기업의 책임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ESG 평가의 신뢰는 잘한 일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 못지않게 부정적 사건을 얼마나 공정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반영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산업별 특성을 반영하는 방식도 더욱 정교해진다. 반도체·IT하드웨어, 철강·화학·소재, 자동차·운송, 건설·산업재, 플랫폼·게임·통신, 소비재·유통, 바이오·헬스케어, 금융 등 8개 업종군별 핵심 ESG 이슈를 구분해 평가한다. 사업모델의 특성상 합리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항목만 N/A로 처리하고, 단순히 기업이 관련 정보를 공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N/A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울러 실제 평가범위를 나타내는 Coverage Ratio를 함께 공개해 평가 결과가 어느 정도의 적용범위와 정보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개편에서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ESG Data Hub’ 구축​이다. 연구소가 2020년부터 축적해 온 기업별 ESG 등급과 E·S·G 부문별 평가결과, 주요 공시정보와 연도별 이력에 새로운 공시·증거기반 평가모델을 결합하는 작업이다. 기업들이 자신의 평가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활용할 수 있는 대시보드도 구축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ESG 평가의 역할을 ‘Rating에서 Data로’ 확장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매년 기업에 하나의 등급을 매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평가 데이터를 통해 기업의 변화와 개선 정도를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비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Rating에서 Data로, 평가에서 개선으로’ 나아가야하는 이유다. 

결국 공시는 신뢰를 남기고, 평가는 그 신뢰에 의미를 부여한다.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 시대를 앞둔 지금, ESG 평가가 기업에 던지는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많이 공개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실행했고,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 이것이 공시의 양을 넘어 질과 실행력을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며, 앞으로 ESG 평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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