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린다. 선수들의 다양한 기록과 데이터를 축적해 경기 전략을 세우고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타자를 평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준은 타율이었다. 얼마나 많은 안타를 쳤는지가 뛰어난 타자를 가르는 핵심 척도로 여겨졌다. 화려한 안타와 홈런은 팬들의 환호를 이끌었고, 높은 타율은 최고의 타자를 상징하는 지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 야구의 평가는 달라졌다. 메이저리그를 중심으로 발전한 세이버메트릭스는 타자의 진정한 가치를 단순한 타율이 아니라 출루율에서 찾았다. 안타는 물론 볼넷과 몸에 맞는 공까지 포함해 얼마나 자주 베이스를 밟았는지가 팀의 득점과 승리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방대한 경기 데이터를 통해 입증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안타의 개수가 아니라, 팀이 득점할 기회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느냐였다.
좋은 타자는 좋은 공을 기다릴 줄 안다.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는 선구안으로 불필요한 헛스윙을 줄이고, 때로는 볼넷 하나만으로도 팀의 득점 기회를 만든다. 화려한 홈런은 팬들의 박수를 받지만, 승리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꾸준한 출루와 기회의 축적일 때가 많다.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다. 기업에게 안타와 홈런은 매출, 영업이익, 순이익 같은 재무성과다. 오랫동안 투자자와 시장은 이러한 숫자를 중심으로 기업을 평가해 왔다. 분기 실적이 개선되면 기업가치는 상승했고, 이익이 감소하면 시장은 곧바로 기업의 미래를 의심했다. '기업의 성과는 곧 재무제표'라는 공식이 자본시장의 오랜 기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AI 전환, 기후위기,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리스크가 일상이 된 오늘날에는 재무성과만으로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현재의 실적은 보여줄 수 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위기를 견뎌낼 수 있는 기업인지는 숫자만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ESG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ESG는 기업의 '출루율'과 같다. 당장의 화려한 홈런은 아니지만, 위기를 관리하고 이해관계자의 신뢰를 쌓으며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결국 미래의 기업가치는 재무성과라는 안타와 홈런뿐 아니라, ESG라는 출루율까지 함께 봐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환경(E)은 기후변화와 환경규제에 대응하며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사회(S)는 인재와 고객, 협력회사 등 이해관계자와 신뢰를 쌓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경쟁력이다. 지배구조(G)는 위기 상황에서도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업의 시스템이다. 이 세 가지는 당장의 매출이나 이익으로 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미래의 위험을 줄이고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는 기업의 '선구안'이라 할 수 있다.
좋은 타자가 스트라이크와 볼을 정확히 가려내듯, 좋은 기업도 미래의 위험과 기회를 미리 읽어낸다. 단기 실적에만 매달리는 기업은 날아오는 공마다 무작정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와 다를 바 없다. 반면 ESG를 경영의 기준으로 삼는 기업은 당장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기업가치와 이해관계자의 신뢰를 먼저 생각한다. 결국 ESG는 단순한 평가 항목이 아니라, 기업이 어떤 공을 치고 어떤 공을 흘려보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선구안'인 셈이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지속가능성 공시의 목적을 '투자자의 의사결정에 유용한 정보'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투자자가 궁금한 것은 기업이 올해 얼마를 벌었느냐가 아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예상치 못한 위험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회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ESG 정보는 바로 그 미래 기업가치를 가늠하는 핵심 단서다.
글로벌 투자자들의 평가 기준도 이미 달라지고 있다. 재무제표가 기업의 과거 성과를 보여주는 성적표라면, ESG는 미래 경쟁력을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기업이 기후위험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공급망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하는지, 이사회가 장기적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지는 이제 미래 현금흐름과 기업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자리 잡고 있다.
야구에서 높은 타율이 반드시 최고의 타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꾸준히 출루하는 선수가 팀 승리에 더 크게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단기 재무성과가 뛰어난 기업보다 ESG 경영을 통해 신뢰와 회복력을 축적한 기업이 결국 더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는다.
이제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재무성과라는 '안타'만으로 기업을 평가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ESG라는 '출루율'과 '선구안'을 함께 읽어낼 때 비로소 기업의 진짜 경쟁력이 보인다. 좋은 타자는 화려한 스윙보다 공을 보는 눈으로 기억된다. 미래의 위대한 기업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실적보다 미래를 읽는 선구안, 그리고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ESG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좋은 타자를 만드는 것은 타율이 아니라 출루율이다. 그리고 위대한 기업을 만드는 것은 단기 실적이 아니라 ESG라는 선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