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투명·윤리 강조에도 사고기업·죄악주 투자 여전
수익률과 책임 사이 균형감 갖춰야
| 한스경제=김동주 기자 |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를 본격화한 지 20년 가까이 흘렀다. 지난 2006년 책임투자형 펀드를 시작으로 ESG 요소를 고려한 운용을 확대해 온 국민연금의 ESG 투자 규모는 현재 수백조 원에 달한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강제부담금으로 운영되는 공적기금이다. 단순히 수익률만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투명한 지배구조·국민가치 실현이 핵심 평가 기준이 되야 한다. ESG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국민연금이 국민의 기금으로 ‘사회적 신뢰자산’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국민연금은 2015년 기금운용지침에 ‘지속가능성의 원칙’을 포함하고 2019년에는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을 수립해 ESG 운용체계를 제도화했다. 최근에는 국내외 주식뿐 아니라 채권, 대체투자 자산까지 책임투자 적용 범위를 넓히며 제도적 기반을 강화했다. 그러나 운용 규모가 커진 만큼 실제 투자 내역과 책임투자의 철학이 일치하지 않아 오히려 ‘ESG 역행’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올해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이른바 ‘죄악주’로 불리는 술·담배·도박 관련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투자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연금은 죄악주라는 별도 기준을 갖고 있지 않지만 국회 등의 요구에 따라 금융산업계 내에서 술, 담배, 도박 업종으로 분류된 기업들에 대한 투자 현황을 제출하고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기금의 죄악주 투자 규모는 올해 2월 기준 6조 413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중 KT&G 등 담배 관련 기업 투자 비중이 약 70%를 차지했다. 공적기금이 국민 건강과 직결된 산업에 여전히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책임과 상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설업계 투자도 문제로 지목됐다. ‘최근 5년간 국내 10대 건설사 사고 사망자 및 국민연금 투자 현황’에 따르면 국내 상위 10대 건설사 가운데 사고 사망자가 가장 많은 1~5위 기업에 국민연금이 총 7028억 4487만원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기준 국민연금은 사고 사망자가 가장 많은 대우건설에 727억원, HDC현대산업개발 1464억원, 현대건설 2119억원, GS건설 1301억원, DL이앤씨 1415억원 등을 투자했다. 5년간 사고 사망자는 대우건설 19명, HDC현대산업개발 17명, 현대건설 16명, 지에스건설 12명, 디엘이앤씨 11명 순이었다.
노동권 보장과 산업안전은 ESG 평가의 핵심 항목임에도 실제 투자 대상 기업에서 중대재해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외에도 국민연금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게 지급한 급여를 가해기업들로부터 제대로 회수하지 못한 채 오히려 해당 기업들에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은 지난 2011년 이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관련 구상결정 136건(총액 21억원)에 달했지만 실제 징수는 16건(2억 7000만원, 징수율 13%)에 불과했다.
국민연금은 피해자 구상금을 받지 못한 가해기업들에게 여전히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현재 SK케미칼 지분 5.9%, 롯데쇼핑 7%, 이마트 11.6%, 애경산업 1.4%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옥시레킷벤키저에도 114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지 중이다.
또 다른 문제는 등급별 투자성과의 불균형이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민연금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식 ESG 정기 평가 대상 종목 가운데 AA등급 123개 종목의 2019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누적 투자 수익률은 48.6%, A등급 201개 종목의 경우 95.59%다. 반면 C등급 102개 종목은 -21.73%, D등급 4개 종목은 -28.74%로 투자수익률이 낮았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ESG 평가 등급이 낮고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기업에 투자하는 게 맞느냐”는 김윤 의원의 질의에 “달리 취급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고 했다.
위탁운용사 관리체계의 허점도 드러났다. 국민연금은 주식과 채권 위탁운용사 선정 시 ESG 평가에 가점을 부여하고 있지만, 사모펀드 등 대체투자 부문에는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국정감사에서는 국민연금의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 투자와 관련한 질타가 쏟아졌다. MBK파트너스는 지난 2015년 홈플러스를 인수했고 당시 국민연금은 6121억원을 투자했다. 홈플러스가 지난 3월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하면서 국민연금이 MBK파트너스로부터 회수해야 할 자산 규모는 평가손실 및 배당 감소분을 합산해 공정가치 기준 약 9000억원에 달한다.
김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투자했고 손실이 발생했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며 “당시의 투자 판단에 대해 송구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국민연금이 책임투자 원칙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를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ESG 배제기준이 불명확해 기업에 대한 투자 제한이 사실상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 수익성과 공공성 사이의 충돌도 구조적인 문제로 꼽힌다. 연금기금의 기본 임무가 장기 수익률 확보인 만큼, 배당이 높고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가진 업종의 투자 비중을 줄이기 어렵다.
국민연금이 진정한 책임투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투자배제 기준의 명확화 ▲등급하위 기업의 사후관리 강화 ▲위탁운용사 ESG 평가 확대 ▲투명한 운용 공시와 국민 소통 강화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사회적 논란이 큰 기업이나 산업에 대한 투자근거를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ESG 평가 결과를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국민참여형 책임투자 모델’ 구축이 요구된다.
한 연금 전문가는 “국민연금의 ESG 투자는 단순한 자산운용 전략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직결된 사회계약의 문제”라며 “책임투자라는 이름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수익률 중심의 관성을 넘어, 국민의 윤리적 기대에 부합하는 실질적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분석했다.